November, 2026
자꾸 눈에 밟히는 폰트가 있나요?

저는 요즘 어딘가 무겁고, 장난스러운 서체가 눈에 아른거립니다. 작업할 때 자주 사용하는 건 항상 단정하고 조용한 서체인데, 정작 눈이 가는 건 그 반대편에 있는 글자들인데요. 비주얼과 웹 작업 중심인 저에게 이 서체는 쉽게 꺼낼 수 있는 서체는 아니지만,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생겼는지 궁금해지는 그런 서체입니다. 이름도 소개도 한글 서체에 가깝지만, 사실 저는 이 서체의 영문 글자들을 더 좋아하는데요.

가석체 — 돌에 무게를 더하다
그래도 시작은 한글부터 보는 게 맞겠죠? 가석체는 장가석 디자이너가 JAMO와 함께 만든 한글 디스플레이 서체인데요. 이름은 더할 가(加)에 돌 석(石), 돌에 무게를 더한다는 뜻이고, 디자이너의 이름 가석(家碩)과도 발음이 같습니다. 산돌구름 인터뷰를 보면 대학교 타이포그래피 수업 과제에서 시작했고, 출발점은 "엄청 두꺼운 폰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글을 두껍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인데요. 한 글자 안에 자음과 모음, 받침까지 들어가다 보니, 획이 굵어질수록 안쪽 공간이 금방 좁아져 그렇다고 합니다. 굵은 한글 제목이 덩어리처럼 보이기 쉬운 이유이기도 한데요. 가석체는 거의 한계에 가까운 굵기인데도 글자의 형태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두껍게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건, 두꺼운 채로 읽히게 하는 일입니다.
그럼 이렇게 두꺼운데 어떻게 읽히는 걸까요? 디자이너의 설명에 따르면 가석체는 굵은 획으로 네모틀을 채우되, 획 끝에 알맞은 각을 줘서 자연스러운 속공간이 생기도록 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들여다보면 획과 획 사이에 가느다란 틈이 반복되고, 이 틈 덕분에 무거운 획 속에서도 글자의 윤곽이 보입니다. 위 영상은 ‘석’의 가운데를 확대해 틈만 채워본 건데요. ㅅ 아래와 ㅅ과 ㅓ 사이, ㅓ 옆, ㄱ 위로 틈이 이어지는 게 보입니다. 이런 공간에 대한 고민은 다른 글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꼬’는 왼쪽 ㄱ만 곡선으로 그렸는데, 두 ㄱ을 모두 직선으로 그리면 바깥에 생기는 여백을 채우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헤드라인을 위한 서체
다만 가석체를 실제로 사용할 때는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요. 이 서체는 처음부터 디스플레이용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먼저 서체는 크게 본문용과 디스플레이용으로 나뉩니다. 본문용은 작은 크기에서도 편하게 읽히도록 형태를 단순하게 다듬고, 디스플레이용은 작은 크기의 가독성을 조금 내려놓는 대신 큰 크기에서 강한 개성을 보여주는 쪽을 택한다고 해요.
가석체는 그중에서도 디스플레이 쪽 끝에 있는 서체인데, 굵기도 Heavy 하나만 있는 아주 과감한 서체입니다. 이 서체를 만든 디자이너 역시 가석체는 워낙 두꺼워 사실 쓰기 어렵고, 작은 크기에서는 더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30pt 이상에서 쓰기를 권장하는데요. 그 이유는 작게 쓸 때 획 사이의 틈이 가장 먼저 닫히기 때문입니다.


대신 디자이너가 바란 건, 누군가 이 서체를 아주 큰 포스터나 간판에 써주는 것이었다고 해요. 실제로 그래픽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경기도자미술관 소장품 상설전 《현대도예-오디세이》 포스터에 가석체를 디스플레이용으로 썼고, 전시 현장과 도록에도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석체를 크게 쓰면 어떤 모습일지 직접 만들어봤는데요. 위 이미지는 ‘디스플레이 서체 전시’라는 가상의 전시를 정해두고 만든 예시입니다. 왼쪽은 전시장 벽에 걸린 포스터, 오른쪽은 SNS 피드에 올라갈 홍보 이미지예요.
포스터에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사자성어를 넣었습니다. 사자성어나 짧은 슬로건은 글자 수가 적어 그래픽적으로 활용하기 좋고, 크게 키워도 부담이 없어서 가석체가 가장 잘 보이는 크기로 쓸 수 있어요. 타산지석에는 돌 석(石) 자가 들어 있어서 가석체라는 이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SNS 이미지는 ‘무거운 글자들’과 ‘HEAVY LETTERS’를 프레임 아래쪽에 쌓아 올려서 무게감이 느껴지도록 했어요.

그렇다고 가석체가 무겁기만 한 서체는 아닌데요. 일부 문장부호와 기호는 오픈타입 기능으로 굵은 버전과 가는 버전을 함께 제공합니다. 기본 상태에서는 괄호나 기호도 글자만큼 두껍지만, 스타일 세트(ss01)를 켜면 가는 선으로 바뀌는데요. 소괄호와 대괄호, 《 》 같은 겹화살괄호 그리고 +, =, @, #, % 같은 기호까지 모두 39개가 대상입니다. 가는 괄호로 감싸면 무거운 글자는 그대로 두고, 괄호는 글자가 아닌 테두리 역할만 한다고 볼 수 있겠죠. 숫자 0도 다른 스타일 세트(ss02)로 안쪽에 사선이 그어진 형태를 고를 수 있습니다. 피그마에서는 텍스트를 선택한 뒤 Typography 패널의 상세 설정(Details)에서 Stylistic set 1, 2를 켜면 바로 써볼 수 있습니다.
직접 써본다면 몇 가지만 챙기면 될 것 같은데요. 우선 실제로 쓸 크기에서 꼭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큰 시안에서 좋아 보였던 서체도 작은 화면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아주 크게 쓸 때는 글자 사이가 오히려 벌어져 보일 수 있어서, 자간을 살짝 좁혀주면 덩어리감이 훨씬 단단해집니다. 굵기가 하나뿐이니 위계는 크기로 나누고, 본문이나 버튼, 캡션 같은 작은 글자에는 다른 서체를 쓰는 게 맞겠죠?
그러다 보니 웹에서 가석체가 설 자리는 넓지 않습니다. 랜딩 페이지의 첫 화면이나 캠페인 페이지의 큰 제목처럼, 한 줄이 화면 전체를 끌고 가야 하는 영역 정도입니다. 한 화면에서 한 번, 가장 크게 말하는 역할을 위한 서체인 셈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글 이야기라면, 제가 좀 더 좋아하는 건 영문 쪽인데요. 한글이 획 끝의 각으로 틈을 만든다면, 영문은 속공간 자체를 가느다란 틈으로 줄여버립니다. 위의 ‘DEFY THE CURRENT’는 키네틱 영상을 만들면서 글자를 세로로 늘려본 건데, 이렇게 늘려도 D의 안쪽은 세로 홈 하나만 남았고, E의 가로획 사이는 얇은 칼집처럼 파여 있습니다. R의 속공간은 작은 알약 모양으로 줄었고, U는 가운데 가는 홈 하나로 두 기둥을 겨우 나누고요. N은 더 과감한데, 위에서 내려오는 틈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틈, 엇갈린 칼집 두 개만으로 사선을 그려냅니다.
둥근 C, U와 각진 Y, N, T가 한 줄 안에서 부딪히다 보니, 문장 하나만 놓아도 그래픽처럼 보이는데요. 재밌는 건, 디자이너가 처음 본 실제 사용 사례도 영문 간판이었다고 합니다. 출시 한두 달 뒤, 인천 차이나타운의 한 카페에서요.

위 이미지는 ‘SAVE ME FOR THE BIG HEADLINES’, 즉 큰 제목을 위해 아껴두라는 문장을 크게 넣고, 그 아래에 ‘본문이나 캡션, 그리고 이런 각주에는 쓰지 말 것’이라는 작은 주석을 달아본 예시입니다. 가석체는 확실히 헤드라인을 위해 만들어진 서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 한글이든 영문이든, 어떤 크기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먼저 정하고, 거기에 맞게 형태를 설계한다는 점은 UI 작업에서 서체 크기와 위계를 정할 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요즘 해외 디자인 업계도 비슷하다고 하는데, 지난 몇 년간 단정한 산세리프가 대세였다면, 이제는 개성이 드러나는 서체와 손으로 만든 듯한 거친 질감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합니다. 가석체가 유독 눈에 밟혔던 것도 어쩌면 그런 흐름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큰 제목 한 줄이 필요한 날이 오면, 그땐 이 서체를 한번 활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가석체는 Google Fonts에서 오픈소스 라이선스(OFL)로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